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폰 비스마르크 (문단 편집) ==== [[비스마르크 체제|비스마르크 동맹 체제]] ==== *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 * '''[[러시아 제국|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 [[보불전쟁]] 이후 절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며 독일의 안전이 보장되었던 [[1890년대]]까지의 유럽의 외교 구도를 흔히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베르사유 조약|베르사유 체제]]라든가 [[냉전]] 체제와 다르게, 외교사에서 한 체제에 특정 인물의 이름이 붙은 몇 안 되는 사례이다.[* 앞선 19세기 초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체제의 사례도 있긴 있다. 다만 메테르니히 체제는 [[빈 체제]]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사적인 반동 복고 주의적 가치관과는 별개로 [[수상]]으로서 활동한 공무에서 유일하게 까이는 점이, 비스마르크 같은 [[능력자]]가 아니면 유지하기 곤란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인데, 비스마르크는 퇴임 이후에도 자신을 멀리하는 [[빌헬름 2세|황제]]에게 간언하거나 [[언론]]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하는 등, 계속 업무를 유지했으면 체제는 더욱 굳건해져 뛰어난 외교관이 없어도 유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공무에서 은퇴했음에도 여전히 막대한 발언권을 가지고 [[비선]]으로서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계 원로들이 시대와 국가 불문하고 존재하는것을 생각한다면, 당시 독일 정계가 귀담아들을 준비만 되어 있었다면 비스마르크는 충분히 사망 직전까지 독일 제국의 외교전선을 막후에서 지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computasaur.tripod.com/politicalcartoonofeuropeanalliances.jpg|width=100%]]}}} || ||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풍자한 그림. '''[[왕따|고립되어]] 울상인 [[마리안(프랑스)|마리안]][* 프랑스를 뜻한다.]'''이 요점.[* 해당 외교 정책을 차륜동맹(Hub-Spoke Aliance)이라고 부른다.] || 독일 제국의 수립 이후 비스마르크는 숙적 프랑스가 세력을 재건하여 독일에 복수할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이에 따라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을 외교 정책의 제1 과제로''' 삼았다. 또 비스마르크는 일관되게 '''"외교란 [[러시아 제국|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라는 철칙을 강조했고, 프랑스의 고립도 이 수준의 원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리적으로 유럽 중부에 위치한 독일의 여건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필연적으로 '''양면전쟁'''의 양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러시아 혹은 프랑스 중 한 나라와는 친하게 있을 필요가 있다. [[영국]]이 각지의 식민지 확장 등으로 기타 강대국들과 갈등이 심한 가운데 유럽 내에서는 중립적 태세를 취하자, 공통의 이해 관계가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손을 잡는 동시에 친[[러시아]] 정책을 폈다. 이를 통해서 프랑스가 유럽의 어떠한 강대국도 [[우방]]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도록 원천봉쇄시킨 것이다. 통일 이후에는 전쟁을 벌였던 오스트리아와 관계를 회복시키고 프랑스를 고립시켰으니 비스마르크의 외교력이 어떤 수준이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다. 이렇게 독일, 오헝제국,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를 [[3제 동맹]]이라고 하는데, 세 국가가 모두 [[제정]]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19세기]] 후반 유럽 내 세력 균형의 효시로 평가된다. 그러나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범[[슬라브]]주의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잦은 위기가 벌어졌는데,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당시 러시아의 지지를 받는 [[발칸]] 국가들의 영토 확장을 [[베를린 회의|베를린 조약]]을 통해 축소시키면서 갈등이 심각해져 한때 3제 동맹은 중단되었다. 비스마르크 본인은 러시아가 다시 독일과 손을 잡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1881년]] 재건된 3제 동맹은 [[1884년]]에 재확인되고, [[1887년]]에는 독일과 러시아 간에 재보장 조약이 맺어져 비스마르크의 해임까지 생명을 유지한다. 이렇게 3제 동맹이 재건되기는 했지만, 이미 러시아는 베를린 회의에서 독일이 러시아 편을 들어주지 않고 중재자 위치를 고수한 것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을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3제 동맹은 지속적으로 배출되는 유능한 외교관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비스마르크 개인 능력에 의존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비스마르크의 퇴진 이후, 독일은 러시아와 전통적 우호관계를 중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외교 기조 자체는 의지가 더 중요하지 꼭 능력이 필요한것만은 아니라 정말 비스마르크의 혼자의 능력만에 의존해야 했는지는 약간 애매하고, 이후의 독일이 엇나간 훨씬 더 큰 원인은 비스마르크의 외교기조에 반발한 [[빌헬름 2세]]가 [[세계 정책]]을 펼치면서 그동안 이뤄놓은 외교적 성과를 무위로 돌려 완전히 말아먹었기 때문이었다. 자유주의자인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와는 성향상 자주 대립했고,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황후]]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또한 집권 초기에는 철과 피를 외치며 전쟁으로 독일 통일을 달성했지만, 통일 후에는 사람이 바뀐 것마냥 [[평화주의]]자로 돌변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항상 보수적 [[현실주의]]자였고, 독일이 통일된 지배적 강대국이 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독일에 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빌헬름 2세]]를 비롯한 팽창론자들에게 밀려 물러나면서, 비스마르크는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에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실제로 15년 후 삼국 협상이 성립되고 독일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양면전쟁]]에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그가 해임된 [[1890년]] 이후 17년 만에 유럽 내에서는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의 대립이 심해졌고, 그 원인도 빌헬름 2세의 반영 - 반러시아 정책이었다. 다만 기폭제가 된 [[발칸 반도]] 문제는 오히려 [[1870년대]] 이후로 계속 심각해지던 문제로, 비스마르크도 '여리박빙'의 상황에서 다루었던 문제이다. 일례로 러시아와 재보장 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2국 동맹을 각각 맺었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졌다. 이 난제를 잘 다룬 것이 비스마르크의 업적에 포함된다. 하지만 결국 러시아와의 동맹은 독일의 재보장 조약 갱신 거부로 인해 깨지게 되었고, 분개한 러시아는 1892년에 프랑스와의 [[러불동맹]]을 맺어서 독일 포위를 사실상 완성시켰다. 이렇게 보면 비스마르크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독일 입장에서도 더 낫겠지만, [[세계 정책|식민지 쟁탈전에 막차를 탔던 그때의 독일]](=[[빌헬름 2세]]) 입장에서는 비스마르크 체제를 유지하면서 팽창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는 중립을 지켰던 과거와 다르게 아프리카와 뉴기니 그리고 [[키아우초우|산동반도]]를 차지하게 되니 기존 식민지를 많이 확보한 영국과 프랑스와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고, 또한 보어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지원을 해준 [[보어전쟁]]과 직접적으로 프랑스와 외교로 싸운 [[모로코 위기]]로 영국과 프랑스와의 극심한 외교적 분쟁이 일어나자 당연히 물러설 리 없는 빌헬름 2세가 해군을 팍팍 밀어주면서 영국의 [[역린]]을 건드렸고,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러시아와 함께 중요했던 영국이 등을 돌리고 프랑스와 [[영불협상]]이 성사되는 결과가 일어났다. 유럽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비스마르크 체제]]는 유지되기 극히 어려운 곡예 외교적인 산물이었다. 영-러는 숙적, 독-오도 몇번이고 전쟁했던 사이, 러-오는 발칸을 두고 대립중 등등. 1차대전만 해도 발칸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이 외교상태 유지를 위해 유언비어나 선동 등에 의지했고, 동맹으로 얻을 이득보다는 '동맹을 위한 동맹'에 가까운 정책을 펼쳤다. 이렇다보니 시간이 지나자 외교가에선 비스마르크가 뭔가를 하면 일단 부정적으로 보는 기조가 확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